방송을 보다 보면 ‘유튜브’를 ‘너튜브’라고 부르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장난스러운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번 듣다 보면 이상하게 불편한 감정이 듭니다. 분명 이름이 ‘유튜브’인데, 왜 굳이 돌려서 말해야 할까요? 저는 유튜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온전히 부르지 못하는 분위기에는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 현상은 ‘유튜브’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방송에서는 종종 다른 방송사의 이름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M본부”, “S본부”, “K본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누가 들어도 어느 방송사를 말하는지 알 수 있지만, 굳이 이름을 피하는 것이지요. 이유는 대체로 광고 효과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특정 기업이나 플랫폼의 이름을 정확히 말하면 그 쪽을 홍보해 주는 셈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공정함을 지키려는 태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스스로를 검열하는 관행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그 누구도 속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너튜브’라고 하면 모두가 ‘유튜브’를 떠올리고, ‘K본부’라고 하면 ‘KBS’를 바로 생각합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비틀어 사용하는 행위는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정확히 말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객관적이다”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이처럼 불편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언어의 정직함이 훼손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어는 사실을 전달하는 도구이자, 서로를 잇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스스로 비틀고 감추는 순간, 언어는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너튜브’라는 표현을 들을 때 느껴지는 어색함은 단순한 말장난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직접 말하지 못하는 사회의 그림자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문득 홍길동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지금의 상황을 그만큼 비극적으로 볼 일은 아닐지라도,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현실은 그 문장의 뒷맛과 닮아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정확히 부른다는 것은 곧 존중이자 진실을 밝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조차 광고나 경쟁, 혹은 손해의 관점으로 계산하려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는 진실한 말 한마디조차 쉽게 흐려집니다.
해외 방송을 보면 이러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미 팰런 쇼에서는 “Youtube”를 정확히 부릅니다. 트위터나 넷플릭스, 틱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특정 플랫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광고가 아니라 현실의 일부를 설명하는 행위로 받아들입니다. 정확한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곧 사실의 정직함을 지키는 일, 그리고 언론의 신뢰를 유지하는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정확히 말하면 손해 본다’는 묘한 심리가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면 괜히 그쪽 편이 되는 것 같고, 특정 기업을 언급하면 상업적인 냄새가 날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말은 점점 비껴가고, 진실은 흐려집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연결된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이름을 숨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너튜브’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이미 ‘유튜브’를 알고 있고, ‘K본부’라고 해도 그 의미는 명확합니다. 차이는 단 하나입니다. 정직하게 부르느냐, 아니면 돌려서 부르느냐.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일은 단순히 발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어의 품격이자 사회의 성숙함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언어가 정직할 때 사회는 투명해지고, 언어가 비겁해질 때 사회는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저는 여전히 ‘너튜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약간의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정직한 말을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작은 저항의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방송에서, 사람들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유튜브”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때야말로 말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순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