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과 윌슨을 함께 읽다.

개요

우연한 계기로 수전 손택‘해석에 반하여(Against Interpretation, 1965)’에드워드 윌슨‘통섭(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1998)’을 연이어 읽게 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영역의 책이라 생각했지만, 읽고 나서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 구조를 발견했습니다. 한 권은 예술을 메시지로 환원하지 말라고 말하고, 다른 한 권은 지식을 하나의 설명 체계로 통합하려 합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사유 모두 ‘환원’이라는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이 공통 구조를 환원주의적 구조(Reductionist Structure)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손택과 윌슨을 함께 읽다’라는 제목 아래, 두 책을 간략히 소개하고 이 환원주의적 구조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해석에 반하여

 

해석에 반하여는 1965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한국어 번역본은 2025년에야 초판이 인쇄되었습니다. 다소 늦은 소개라 할 수 있겠습니다.
비평가가 다운 해박한 문화, 예술 지식과 거침없는 비평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책 속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작품을 모두 따라가는 것은
제 입장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몇몇 작품을 따로 찾아보며, 손택이 무엇을 비평하는지 겨우 따라가는 정도였습니다.
제가 이해한 손택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예술을 메시지로 환원하지 말라.”

예술 작품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를 지나치게 찾아내려 하기보다, 작품 그 자체의 감각과 형식을 경험하라는 요청으로 읽었습니다.
사실 예술이나 문화에 일가견이 있지 않고서야 작품의 숨은 의미 즉, 알레고리(Allegory)를 찾는 다는 것은 일반인 들에 있어서는 이차적인 문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택이 겨냥한 것은 단순한 대중이 아니라, 작품을 끊임없이 해석하고 상징과 메시지로 환원하려는 근대적 비평 태도 그 자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독해, 프로이트식 상징 해석, 도덕적/정치적 의미 부여 등, 작품을 ‘무엇을 말하는가’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관행이 예술의 감각적 생동성을 약화시킨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해석에 반하여’는 단순히 해석을 거부하자는 선언이라기보다, 예술을 먼저 감각하라는 미학적 요청에 가깝습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작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체사레 파베세, 시몬베유, 알베르 카뮈, 미셀 레리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게오르크 루카치, 장 폴 사르트르, 나탈리 샤로트, 외젠 이오네스코, 롤프 호흐후트, 베르톨트 브레히트, 장 콕도, 로베르 브레송, 장 뤽 고다르 등 당대의 주요 작가와 예술가들이 언급됩니다.

프랑스 작가들이 상당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데 이는 이 글의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950~60년대 파리는 실존주의, 구조주의, 누보 로망, 부조리극, 누벨바그 영화가 폭발적으로 등장하던 문화적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해석에 반하여’는 예술에 대한 지나친 의미환원을 경계하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당대 예술의 흐름속에서 자신의 미학적 태도를 천명한 비평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할 만한 유튜브 링크 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남의 해석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에 대하여

통섭(Consilience)

 

통섭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까지 각자 따로 설명해 온 세계를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묶어 보자는 제안입니다.

책은 출간 직후 큰 호응을 얻었고, 이후 다소 잠잠했다가 최근 개념적인 측면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당시에 자연과학 진영 으로부터는 비교적 긍적적인 호응을 얻었지만 인문학 및 철학 진영에서는 “통섭이 아니라 과학의 일방통행이다”라는 상당히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통섭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용어로 ‘융합’이나 ‘컨버전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저는 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융합은 중심 없이 여러 지식을 모아놓는 느낌이라면 통섭은 하나의 중심 원리로부터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려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통섭은 나무구조(Arborescent)에 가깝고 융합은 리좀(Rhinome)에 가깝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통섭은 하나의 세계관을 지향하지만 융합 또는 컨버전스는 필요할 때마다 다른 세계를 여는 기술에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통섭은 인류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강한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지식은 결국 하나의 근원적 질서로 수렴해야 한다는 믿음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다음 링크는 번역자인 최재천 교수의 강연 유튜브 입니다.
[지식향연] 통섭의 시대_최재천 교수

흥미로운 점

두 책을 읽으며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환원’이라는 개념입니다. 물론 두 책이 말하는 환원의 방향은 다릅니다. 그 차이를 넘어 두 사상을 함께 묶을 수 있는 표현으로 저는 ‘환원주의적 구조(Reductionist Structure)’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해석에 반하여’에서 손택이 비판하는 것은 하향식 환원입니다. 감각적이고 복합적인 예술을 메시지나 이데올로기로 낮추는 해석의 구조입니다.
반면 ‘통섭’은 상향식 환원을 시도합니다. 생물학과 진화라는 하위 과학으로부터 윤리와 문화, 예술까지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하나의 전제를 공유합니다. 상위의 것을 더 근본적인 층위로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저는 이 공통 구조를 ‘환원주의적 구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현대는 다양한 생각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술적인 사조도 그렇고 철학적인 사유도 그렇습니다.
중심을 어디에 잡아야 할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휴에 두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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