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선험적(先驗的)이라는 말은 철학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중세 스콜라철학이나 근대 대륙의 합리론(데카르트, 라이프니츠)에서는
선천적(a priori) – 선험적과 혼동하기 쉬움 – 과 후험적(a posteriori)을 구분하여
경험 이전과 경험 이후의 인식을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칸트는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는 말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선험적’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이는 단순히 ‘경험 이전’이라는 의미와는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원전에서도 ‘a priori’가 아닌 ‘transzendental’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며,
이는 인식의 조건과 관련된 보다 근본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번 글에서는 선험적이란 어떤 의미인가? 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험적과 혼동되는 개념
개요에서 언급했듯이, ‘선험적’ 개념과 혼동되기 쉬운 용어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선천적(a priori)
선천적(a priori)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도 성립하는 인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2 + 2 = 4”와 같은 수학적 명제는 경험을 통해 확인하지 않아도 참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중세 스콜라철학과 근대 합리론에서
이 개념은 경험 이전에 주어지는 인식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데카르트는 이를 선천적 관념(innate ideas)으로 설명하며,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관념들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감각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이성의 진리(truth of reason)로 규정하며,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논리적 분석만으로 그 타당성이 증명되는 진리로 보았습니다.
초월적(transcendent)
초월적(transcendent)은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신, 영혼, 세계 전체와 같은 개념들은
감각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없으며,
경험의 영역을 넘어선 대상들입니다.
이러한 대상들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인간 이성이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초월’이라는 말이 철학사에서 꼭 형이상학에서 의미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19세기 미국 사상에서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 용어가 등장합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 과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진리는 외부 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직관과 경험 속에서 직접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봅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여기서 초월은
경험을 완전히 벗어난 영역이라기보다,
일상적 경험을 넘어서는 내면적 통찰의 차원을 의미합니다.
초월적에 대해서 종합해 보면
형이상학적 초월이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을 가리킨다면,
에머슨의 초월론은 “직관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깊은 차원”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험적이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천적(a priori)은 경험 이전의 인식을,
초월적(transcendent)은 경험을 넘어선 대상을 의미합니다.
두 개념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선천적은 경험 이전이라는 시간적 선후를 의미하고,
초월적은 일정한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적이라는 개념은
시간의 선후 관계도 아니고, 경계를 넘고 안 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선험적이란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을 가리킵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정한 형식과 개념의 틀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먼저 감성의 차원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속에서만 대상을 지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도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서 경험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오성의 차원에서는
인과율과 같은 범주를 통해 사건을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과 같은 구조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 이미 전제되어 있는 조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외부에서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선험적 조건에 의해 구성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선험적이라는 개념이 대상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즉, 선험적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를 묻는 개념입니다.
칸트의 선험적에 대한 비판
일부 글에서는 임마누엘 칸트가 제시한 선험적 개념을 완전히 허구적인 것으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일정 부분 타당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문제입니다.
칸트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속에서만 세계를 경험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 특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칸트가 전제한 고정된 시공간의 틀은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범주, 특히 인과율에 대한 문제입니다.
칸트는 인간의 오성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일정한 범주를 사용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범주의 구성이나 개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자에 따라 다르게 설정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범주 체계는 서로 다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칸트의 범주가 절대적으로 고정된 구조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선험적 개념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의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경험할 때 일정한 조건과 구조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즉, 선험적이라는 개념은 특정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조건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구조를 설명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칸트의 개별적인 주장들은 수정될 수 있을지라도,
선험적이라는 개념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맺음말
지금까지 선천적(a priori), 초월적(transcendent), 그리고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는 개념을 비교하며 그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선천적이 경험 이전의 인식을 의미하고,
초월적이 경험을 넘어선 대상을 가리킨다면,
선험적은 이 둘과는 다른 차원에서
경험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개념입니다.
또한 살펴본 바와 같이,
칸트가 제시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범주에 대한 내용은
현대의 관점에서 수정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계를 아무 조건 없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인식의 구조와 조건 속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통찰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칸트의 선험적 개념은
특정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이론이라기보다,
인식이 조건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집니다.
결국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세계 자체라기보다,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선험적이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1개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