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제2이율배반에서 발견한 번역상의 모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중 ‘선험적 이념의 이율배반(모순)‘ 단원을 읽다가 흥미로운 번역오류를 발견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외부 물체는 시간, 공간, 그리고 범주라는 인간 머릿속의 ‘선험적 틀(안경)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유, 도덕, 신, 영혼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들은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인식)할 수 없는 영역이며, 이성이 이를 억지로 인식하려 드는 것은 한계를 벗어난 오만이라는 뜻입니다.

칸트는 이처럼 이성이 한계를 넘어설 때 빠지는 모순들을 ‘정립(Thesis)’반정립(Antithesis)’이라는 대립 구도를 통해 보여줍니다.
그중 ‘제2이율배반(두번째 모순)’이 바로 물질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정립: 물질은 결국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하위 부품인 ‘단순자’로 구성된다.(부품 있음)
반정립: 세상에 단순한 것은 없다. 물질은 공간을 차지하므로 무한히 쪼개진다.(부품 없음)

놀랍게도 칸트는 이 논쟁에 대해 “둘 다 틀렸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상’을 우주 본연의 고정된 ‘실체(물자체)’로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논리적 버그하는 것이죠.
선험적 틀로는 도달할 수 없는 궁극의 영역을 단순히 머릿속 상상으로만 단정 지었으니 양쪽 다 잘못되었다는 진단입니다.

칸트의 핵심은 물질의 최종 구성요소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초월한 영역에 대해 이성만으로 단정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덧붙여 제가 읽고 있는 책(동서문화사 펴냄, <순수이성비판> 312페이지)의 반정립 문구에 심각한 번역 오류가 있더군요.
아래는 실제 원문 사진 입니다.

반정립 부분의 문구는 “세계에서의 어떤 복합물도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세계의 일반적인 단순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로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읽어보면 한 문장 안에서 앞뒤가 충돌하는 비문입니다. 칸트의 원문과 문맥에 맞게 번역하려면 앞부분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합니다.
세계에서의 어떤 복합물도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세계의 일반적인 단순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이죠.

책을 읽다가 이런 오류를 발견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류를 발견했다고 하는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가 되지 않고 있다가 오류를 수정한 후에 그 문장이 이해가 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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